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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참 좋은-

백합꽃과 포스트잇 / 김승희

 

 

 

 

 

 

 

 

 

 

 

 

 

 

 

 

친구가 위암 4기 말기라고 하는데

폐와 간과 임파선에 전이되어 수술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초음파 사진을 보니 하얀 백합꽃이 뭉텅이로 피어난 것 같더라,

시름시름 아파서 누워 있다가

병원 이름만 듣고 택시를 타고 달렸다

그래도 의사들이 고마워, 실험적으로 표적 치료를 해본대,

죽음을 향해 기어가는데 그래도 상냥한 부축을 해주네,

만약이란 말로 타협하긴 싫은데,

병원 일층 로비의 벽에 노란 포스트잇이 주렁주렁 붙어 있더라

응, 희망의 벽이래

말기 환자들이 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붙여놓은 거야,

희망이 문이지 왜 벽이야,

패러독스 같지만 마지막 희망의 벽은 희망의 문이지,

희망의 벽에 노란 포스트잇 편지들을 읽을 수 있어서

나는 참 고마워, 신은 나를 포기했어도

우리는 신을 포기하지 않았구나,

다 함께 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무슨 일인가 일어나지 않을까?

응, 그래,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상실의 고통에서 의미를 찾으래,

아무도 없는 그녀, 아들 하나, 정신병원에 십일년째 입원해 있고,

고독 속에 죽어가는 것보다

고독 속에 살아가는 게 더 무서운 우리들

내일 아침에 눈이 안 떠졌으면 좋겠어

응, 나도 그래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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