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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지는 법 / 김수우 단골찻집 주인이 바뀌었더군 꽃핀다고 들러도 싱거운 눈웃음, 꽃진다고 들러도 맹물 손인사, 잊힐 뻔한 안부마다 한 톨 답례 고맙더니 그 씨앗 받아 여기저기 나누었더니 어느 결에 헤어지고 만 게야. 마음 비운 사이​ 수련 지는 법을 들었네 몇날 철없이 꽃비 뿌리거나 제 열정에 겨워 몸던지는 게 꽃지는 방식이거늘 수련은 잠잠히 물 속으로 돌아가지 소금쟁이가 딛은 고요를 돌아보는 어느 결에 송이째 물에 잠긴다네, 마음 비운 사이​ 고운 사람 내게 수련처럼 졌으니 나도 그에게 한 꽃자리일까 고운 사람 누구에겐가 수련으로 피어날 테니 물속 줄기, 먼 산 하나 풀어내리라 물그림자 흔들리는 그 어느 결에 내 옷자락도 젖을 테지, 그 마음 비운 사이 더보기
눈이 부시게 / 신계옥 들녘을 가르는 첫새벽 묵호행 느린 기차 안에선 발 보다 먼저 부푼 마음이 동해에 닿고 꾸벅꾸벅 졸고 앉은 꿈 속에서도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만난다 여름으로 달음박질치는 바다 물 비늘을 반짝이며 솟구쳐 오르는 펄떡펄떡 싱싱한 일출을 여과 없이 펼쳐 두는 울릉도의 아침은 눈이 부셔라 깃발 들고 나선 길에 흰 갈매기 곡선을 그리며 호위하고 파도도 숨을 참아 울컥 메이는 가슴 뭉클하도록 뜨거운 이름 푸른 가슴 열어젖힌 독도를 끌어안는다 더보기
우포늪 / 황동규 우포에 와서 빈 시간 하나를 만난다. 온 나라의 산과 언덕을 오르내리며 잇달아 금을 긋는 송전탑 송전선들이 사라진 곳, 이동 전화도 이동하지 않는 곳, 줄풀 마름생이가래 가시연(蓮)이 여기저기 모여 있거나 비어 있는 그냥 70만 평. 누군가 막 꾸다 만 꿈 같다. 잠자리 한 떼 오래 움직이지 않고 떠 있고 해오라기 몇 마리 정신없이 외발로 서 있다. 이런 곳이 있다니! 시간이 어디 있나, 돌을 던져도 시침(時針)이 보이지 않는 곳. 더보기
말을 하고 싶다 / 임인숙 저녁 해 그림자 길게 뉘면 말을 걸고 싶다 이슬을 덮고 인적 드문 벤치에 누워 있는 남자 빈 박스, 무겁게 끌고 가는 등 굽은 노인 어두운 골목에서 누군가 기다리는 소녀 말 없는 그들을 흔들어보고 싶다 흔들다 눈물이라도 떨구면 그냥 젖고 싶다​ 축축하게 젖어 무겁게 얹힌 말 누르는 돌을 들어주고 싶다 창문만 두드리다 돌아가는 바람일지라도 말을 걸고 싶을 때가 있다 서쪽으로 그림자 길게 누우면 침묵에 익숙한 그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 더보기
지갑으로 낳은 자식 / 라현자 ​ 세상엔 자식들이 참 많기도 하다 배 아파 낳은 자식, 가슴으로 낳은 자식 요즘은 지갑으로 낳은 자식이 대세라고 하는데 배도 아파보고 입양은 다가 아니라도 마음으로 후원하면서 가슴으로 반은 키워 본 것도 같은데 지갑으로 낳아 길러본 자식이 아직 없으니 내 지갑의 자궁은 아무래도 변변찮은 모양이다 아주 작고 어여쁜 예삐라는 강아지와 중년의 아주머니가 택시를 탔는데 예삐가 낑낑거리며 아주머니 가슴팍에서 연신 칭얼거린다 중년의 아주머니 왈 으엉 울애기 조금만 참아 엄마가 곧 집에 가서 밥줄께 그 말을 듣고 있던 택시 기사님 왈 아이고 뒤에 타신 사모님은 언제 또 개새끼를 낳으셨냐고 더보기
나는 가끔 서해와 동침하고 싶다 / 유현숙 공중을 덮으며 한 떼의 철새들이 밀입국해 온다 기러기떼, 가창오리 떼들, 억새밭 너머에 콩알처럼 깔려 있다 유효기간이 뚜렷이 각인된 바코드를 등에 찍고 저렇듯 세상을 경유한다 저무는 서해는 여전히 해감을 토하며 뒤척이고 온 바다의 뼛속, 붉은 서약이 물컹한 저녁이 뜨겁다 사르륵, 새들의 옆구리에서 깃털 떨어지는 소리 들리고 나는 저 적요 앞에서 이제 옷을 벗는다 더보기
푸른 독 / 하재청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가구처럼 말이 없는 아내 허리가 아프다며 찜질 방 가잔다 말없이 앞정서니 따라나서는 아내 한쪽으로 기우뚱한다 벌써 나무토막만도 못한 몸이다 누구는 풍이 들었다 하나 그녀의 몸에 언제 바람 들 날 있었던가 바람도 잘 들면 오히려 새처럼 가벼울텐데 아마도 바람 먹은 것은 아닐 것이다 어둑할 무렵 길리 찜질 방에 가서 보니 어둠 속에 푸른 독이 빛나고 있었다 세상의 독기를 내뿜으며 앉아 있는 아내 토굴 속에서 눈만 반짝 빛내고 있는데 어찌나 섬뜩한지 눈 둘 바를 몰랐다 아침저녁으로 내뿜는 내 몸의 독기 고스란히 다 받아주느라 온 정성 다했구나 아, 저것이 바로 낯선 그 사람이 되게 하였구나 나이가 들면서 점점 낯선 그 사람 부부는 닮는다더니 바로 내 .. 더보기
광고지 돌리는 여자 / 문성해 신종 아파트 분양 광고지를 돌리는 늙은 여자의 뒤에서 플라타너스 한 그루 나무 밑동에 삐죽이 새파란 잎사귀 몇 개를 달고 서 있다 어서어서 삐라를 뿌리듯 광고지를 돌리는 일일 노동자 여자의 뒤에서 아무도 받지 않는 나뭇잎 몇 장을 간절히 내밀고 서 있다 점심도 굶은 채 수 천 장의 광고지를 돌린 여자는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간다 광고지 속의 아파트가 아닌 허름한 대문간 속으로 한 번도 제대로 읽히지 못한 광고지들이 서부영화 속인 양 휘날리는 보도 위로 아직도 나뭇잎 몇 장을 흔들고 서 있는 나무 앞에서 누구인가 푸른 죽순 물이 뚝뚝 듣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읽어줄 사람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