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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의 정사(情事) / 김춘경 가로등이 졸고 있는 시간 낙엽은 바람과 속삭이고 여느 때처럼 바람둥이 나무는 옷을 벗는다 고혹한 손길을 받은 향 짙은 가을밤 정취에 지나는 행인도 숨을 멈추고 뒤돌아 누운 도로에 낙엽이 쌓일 때면 10월의 하루는 정사(情事)를 끝마친다 애절한 몸짓으로 밤을 삼키며 하나둘씩 끌어안던 길가의 연인들 흔적도 사라지고 밤은 가고 가을이 가고 사랑도 간다 부질없는 연민 속에 세월은 치맛자락을 붙잡고 노예처럼 10월의 밤은 팔려 가고 있다 더보기
시월의 체온 / 안귀분 저온의 바람과 함께 가을이 도착했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피부에 불어오고 시월의 체온이 금풍에 나부낍니다 풀벌레 소리에 귀가 열리고 눈에 머물던 숲의 소리는 어느덧 가을이 되었습니다 마른 잎 몇 개 매달고 있는 잔가지가 쓸쓸한 공중을 흔드는 곳에서 저온에 떨어진 고엽의 그림자는 한 장의 정적입니다 붉게 깊은 가을의 둘레에서 내 가슴에 차오르는 어머니는 저 멀리 있지만 만발한 시월을 빨간 우체통에 넣어 보냅니다 더보기
기러기 나라 / 고두현 ​달 밝은 가을밤에 기러기들이 찬 서리 맞으면서 집으로 간다 지난 겨울 어린 보리 잎 쪼아 먹고 날갯죽지 파릇해진 선배들도 줄지어 퇴근한다 두고 온 깃털이나 떠나보낸 부리들 먼 곳에서 흔들리며 춥지 말라고 바삐 바삐 둥지에 닿아 온몸으로 군불 지피는 사람들 온돌이 조금씩 데워지는 동안 깨금발로 처마 끝 바라보는 모습 뒤로 거울 속 나무 기러기 한 쌍 찡긋하며 마주 보고 눈을 맞춘다. 더보기
가을연가 2 / 김나현 바스락, 갈잎의 속삭임 당신일 것만 같아 아름으로 흩날린 이 길 형형의 색 어루만지며 홀로 걸어 봅니다​ 똑, 한 방울의 상념은 그립다는 말로 번져만 가고 낙엽처럼 멀어진 사람아 가을 한 장 또옥 따서 숨겨둔 몇 자 꾹꾹 새겨 보고 싶은 사랑은 길 위에 흩어지는 노을 더보기
강아지풀 / 김종빈 폭우와 뙤약볕 건너 봄 여름이 지나자 낱낱의 장난끼들 덥수룩하게 길어있다 목대가 휘어지도록 머리가 무거워온다​ 아니다 아니다 바람에 맞서 도리질 치며 묵언의 화두 하나 던져놓고 답을 묻는 할 말을 안으로 감춘 속내를 어찌 알까​ 가을이 깊어갈수록 머리 더욱 숙여지고 헛소리 억지소리 살랑살랑 받아넘기며 길가에 목을 늘이고 세상을 간지럽히는 더보기
단풍이 물드는 이유 / 한승수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울어대던 매미들도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높아진 하늘만큼 잠자리의 날갯짓이 힘겹다 붉게 타오르며 하루의 대미를 장식하는 노을처럼 진정한 아름다움은 소멸의 순간 빛을 발하는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가장 아름다운 몸짓으로 가장 아름다운 언어로 남은 날들을 채워가야 한다 잎을 떨구기 전 단풍이 곱게 물드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더보기
10월의 멋진 날 / 신경희 감미로운 음악 한 소절 미처 보내지 못한 사랑 있어 로마의 휴일의 앤 공주처럼 거리를 나와서 걷고 싶은 10월 어느 멋진 날​ 거리의 많은 사람들 속에 나는 오드리 햅번의 자유를 찾아 길을 나선다. 가슴에 남아 있는 추억의 그림자 먼저 길을 나서고​ 낙엽의 엷은 미소를 받으며 줄달음 치는 마음 한 자락 끝에 흑백의 영상 속에서 조용한 너의 아침 햇살 같은 웃음이 내게 쏟아져 올 때에​ 10월의 멋진 날을 나는 사랑한다. 감미로운 음악 한 소절 미처 보내지 못한 그리움 가을은 그렇게 사랑을 고백한다. 더보기
소꿉놀이 / 김용화 한 세상 흙에서 나 땅 파고 씨를 묻다 저 가을 강변 감빛 물 곱게 드는 저녁노을 속으로 소리소문 없이 잠겨버렸으면 소꿉놀이하다 엄마가 부르면 집으로 돌아가듯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