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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이면 / 공영규 과일가게 앞 채소 파는 할머니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가느다란 가을비 좌판 적신다 참을 만큼 참았는지 하늘 한 번 보고는 굽은 허리로 말없이 주섬주섬 전 거두고 늙은 손놀림 어둔한지 자꾸 헛손질이다 허리 한 번 펴고는 돈 쌈지 만져보고 오고 가는 사람에게 멋쩍은 웃음도 보낸다 등이 굽어서 손끝 야무지신 엄마 생각났다 빨간 고추 공드려 말리다 갑작스런 비에 종종걸음으로 광주리에 담고 멍석 두르르 말며 '왜 하필이면 이때 비 오노 일 안하고 잠자는 밤에 오면 어떤노' 아마 할머니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 같다 빗줄기가 굵은 주름살 파고들 때 허둥대는 손놀림에 툭, 떨어지는 무 하나.. 더보기
익숙함 / 손씨의 지방 시 中 익숙함이란 참으로 무섭다 설렘을 밀어내고 익숙함이 자리하면 관심까지 서서히 도망간다 덩달아 소중함까지!​ 그때 넌 얼마나 외로웠니 지금의 나만큼 외로웠을까? 더보기
윤슬에 붙들리다 / 이태수 강가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물 위에 뜬 구름이 흘러가고 한동안 어슬렁거리던 왜가리도 날아간다 내가 앉아 있는 동안 멈추어 서 있는 것들이 있었을까 알게 모르게 바람이 지나가고 나무와 풀들은 서서도 움직인다 내가 앉아 쉬는 동안 머릿속의 생각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오다가 가고 가다가는 온다 제자리걸음만 하는 윤슬에 붙들린 채 더보기
기다림 / 이미순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 올 것만 같은 그리움 하나가 아직 보이질 않는다 창밖에는 여름내 힘찬 박동으로 푸른 핏줄 솟아 올리던 잎새들은 온데 간데없고 혈색 하나 없는 낙엽들만 허공 위로 가득하다 때로는 후회를 하면서도 지워지지 않는 경계선 하나 그어 놓고 혼자서 눈물 글썽이고 있는 허약해진 마음 가슴속엔 가을바람 스쳐가는 소리만 가득하다 더보기
가을비 / 나태주 어디서 오시나요 누구를 찾아가나요 투덜대며 내리는 가을비 소리 나도 누군가 찾아갈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외로워서 누군가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더보기
문상 가는 길 / 전남진 길이 없어지지 않는다 차 소리에 놀란 산이 눈을 떴다 감고 끊어질 것 같은 산길 어둠이 길을 조금씩 토해놓는다​ 멈춰 선 한 사람의 시간을 찾아가는 길 언젠가 우리 앞에 멈춰 설 시간이 저 울음, 통곡 속에 약속처럼 째깍거린다​ 우리를 부른 그 사람의 한 시절이, 삶이 액자 속에 검은 리본에 묶여 우리를 본다​ 죽음 앞에 바쳐지는 산 자의 시간 산 자를 불러 모으는 죽음의 힘이여. 더보기
거울 / 이외수 ​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더욱 아름답게 치장하기 위해 거울을 만들었다. 일반적으로는 유리에 수은을 바른 거울을 말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세상 만물이 저마다 하나의 거울이다. 시궁창도 고요하면 거울이 된다. 시궁창에도 하늘이 비치고 태양이 비친다. 구름이 흐르고 새들이 난다. 어둠이 깔리고 별똥별이 떨어진다. 마음도 고요하면 거울이 된다. 그 속에도 삼라만상이 모두 비친다. 다른 거울들은 존재의 외면만을 들여다볼 수 있지만 마음의 거울은 그 내면까지를 선명하게 들여다볼 수가 있다. 더보기
​가을산 (청산옥에서 11) / 윤 제 림 ​ ​뭐라겠습니까. 食客 주제에. 찍 소리도 못했습지요. 수천수만의 불타는 치마저고리. 주인은 의논 한마디 없이 산 하나를 홀랑 태웠습니다. 찔끔 오줌이 나올 만큼 서늘한 불구경! 저 불이 다 잡히고 나면 겨울. 옷가지를 잃은 여자들은 벌거숭이로 비탈에 서겠지요. 주인은 거대한 靑樓(청루)를 세울 모양입니다. 청산옥 불탄 자리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