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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참 좋은-

6월의 살구나무 / 김현식 피아노 소리는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 밖엔 비가 내린다 기억나는 일이 뭐 아무것도 없겠는가? 6월의 살구나무 아래에서 단발머리 애인을 기다리며 상상해 보던 피아노 소리 가늘고도 긴 현의 울림이 바람을 찌르는 햇살 같았지 건반처럼 가지런히 파르르 떨던 이파리 뭐 기억나는 일이 없겠는가? 양산을 꺼구로 걸어놓고 나무를 흔들면 웃음처럼 토드득 살구가 쏟아져 내렸지 아! 살구처럼 익어가던 날들이었다 생각하면 그리움이 가득 입안에 고인다 피아노 소리는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 밖엔 비가 내린다 살구처럼 하얀 천에 떨어져 뛰어다니던 살구처럼 추억은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 밖엔 비가 내린다 추억의 건반 위에 잠드는 비 오는 밤 더보기
자벌레, 자벌레가 / 변종태 오일시장에서 열 개에 오백 원 주고 사 왔다는, 칠순 노모가 심어놓은 고추 모종을 자벌레 한 마리가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제 몸을 접고 접어 세상을 재던 놈이 제 몸의 몇 십 배는 됨직한 고추 모종을 해치우고 나서 다른 모종으로 건너가다가 내 눈에 딱 걸렸다. 이걸 어떻게 죽여줄까를 고민하다가 먼지투성이 흙밭에 내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나도 온몸으로 세상을 재던 시절이 있었지 온몸으로 세상의 넓이를 재느라 어미의 생을 갉아먹기도 하고 어떤 이의 상처를 갉아먹기도 하면서, 아, 나도 노모(老母)의 생을 저렇게 갉아먹었을까. 빠끔히 열린 문틈으로 비친 욕실, 노모의 몸뚱이에 내 이빨자국 선하다 더보기
양파 / 안명옥 양파의 몸을 벗겨낼 때마다 양파는 우리를 대신 울린다 미끌미끌한 것은 양파의 유머다 요리조리 빠져나가려는 양파의 자유다 양파는 무수한 칼날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누가 다 파먹었는지 뼈 한 조각도 나오지 않는다 해맑은 표정 속에 수많은 실핏줄을 감추고 사는 양파 몸 어딘가에 자궁을 숨기고 파란 싹을 피워내고 있다 양파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매운 세계가 있다 연애 한번 하자고 몸을 벗겨내다가 속을 알아갈수록 당신은 자꾸 울었다 더보기
나무의 이사 / 이명윤 공원의 나무가 이사 간다 밑동이 굵어 여러 장정이 달라붙었다 묻은 흙이 떨어질까 봐 조심조심 뿌리를 포대에 담는다 이곳은 이제 국화를 심는다 했다 나무가 떠난 자리, 구덩이 꽤 깊다 사람들은 삽시간에 흙으로 덮고 흔적을 지웠다 이십 오년 전 아버지도 어디론가 이사 갔다 우리들은 아버지가 남긴 구덩이를 보며 위험하게 자랐다 어머니 가끔 아버지 사진을 꺼내는 걸 보면 아직도 구덩이를 메우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머니 가슴에 박혔던 나무였다 나무를 실은 트럭이 떠나고 구덩이를 메운 자리 발로 꾹꾹 밟는다 이렇게 쉽게 지워질 수 있다니 한참 쓴웃음을 짓다 허전한 공원을 보았다 나무는 그늘도 새소리도 데리고 갔다 허공에 남긴 구덩이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은 종종 달처럼 뜬다 화.. 더보기
한 송이 들꽃으로 피어 / 박고은 ​ 어차피 작은 뜰에서는 온전히 꽃 피지 못할 마음입니다​ 비록 따뜻한 손길 와닿지 않아 지독한 그리움의 눈물 남모르게 이슬 속에 감출지라도 때리는 비바람 횡포에 야들야들 푸른 잎새 붉은 꽃잎 생채기가 날지라도​ 우러르는 하늘 원 없이 담고픈 소망으로 귓전 밝히는 풀벌레, 새소리 벗 삼아 세상의 곱고 맑은 뜻, 맑은 향기 담고 나 한 떨기 청초한 들꽃을 피우겠습니다 더보기
장마 / 홍수희 내리는 저 비 쉽게 그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고통 없이는 당신을 기억할 수 없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 나는 압니다​ 버틸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가슴에 궂은비 내리는 날은 함께 그 궂은 비에 젖어주는 일,​ 내 마음에 흐르는 냇물 하나 두었더니 궂은비 그리로 흘러 바다로 갑니다 더보기
잊는 일 / 손택수 꽃 피는 것도 잊는 일 꽃 지는 일도 잊는 일 나무 둥치에 파넣었으나 기억에도 없는 이름아​ 잊고 잊어 잇는 일 아슴아슴 있는 일 더보기
행간 / 김시철 요만큼이라도 좀 쉬었다가 갔으면 해서 행간을 두어 놓았습니다.​ 쉬엄쉬엄 가야만 후회할 일도 덜 생길 거고 생각도 더 영글게 아니겠습니까.​ 노상 빨리빨리 서둘러 살아온 삶이라서 많이도 후회되고 낭패도 많았답니다.​ 좀 늦기는 해도 앞으로는 숨 고르는 일만 남았답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