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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참 좋은-

통장정리 / 황원교

 

모某 은행 현금인출기 앞에서

임종을 앞둔 아버지의 통장을 정리하며 울었다

곶감 빼먹듯이 빼먹어 바닥이 드러난 잔고殘高,

바싹 마른 낙엽처럼 바스락 바스락거리는 통장들

앙상하게 뼈만 남은 아버지의 살가죽마저 벗겨내는

패륜을 저지르는 것만 같아서 몸서리가 쳐졌다

돌아보면

내내 마르지 않던 눈물의 강도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정리해야 할 것들이 어디 통장뿐이랴

생각해보면 삶은 저축이 아니라 소비하는 일

쟁여두는 게 아니라 아낌없이 탕진하는 일

잔고를 남기지 않는 인생은 얼마나 치열했던 것인가

그런 아비에 기대어 나는

그의 살과 뼈를 야근야금 파먹고 살았다

무려 쉰여섯 해를

그는 나의 우화羽化를 묵묵히 기다려 주었으나

아직 날아오르지 못하고

한낮을 뒤흔드는 드높은 목청도 갖질 못했다

그 거목이 자신의 몸뚱이를 아낌없이 다 내주고 그것도 모자라

저리 속이 죄다 썩어 문드러지도록

나는 아직 변태를 거듭하고 있는 중이다

징그러운 굼벵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