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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참 좋은-

내가 만약 암늑대라면 / 양애경

 

내가 만약 암늑대라면

밤 산벚꽃나무 밑에서 네게 안길 거다

부드러운 옆구리를 벚꽃나무 둥치에 문지르면서

피나지 않을 만큼 한 입 가득 내 볼을 물어 떼면

너는

만약 네가 숫 늑대라면

너는 알콜과 니코틴에 흐려지지 않은

맑은 씨앗을

내 안 깊숙이 터뜨릴 것이다 그러면 너는

해처럼 뜨거운 네 씨를

달처럼 차가운 네 씨를

날카롭게 몸 안에 껴안을 거다

우리가 흔들어놓은 벚꽃 둥치에서

서늘한 꽃잎들이 후드득 떨어져

달아오른 뺨을 식혀줄 거다

내 안에서 엉기고 꽃피면

(꽃들은 식물의 섹스지)

나는 언덕 위에서

햇볕을 쬐며 풀꽃들 속에 뒹굴 거다

그러다 사냥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무거워진 내 곁을

네가 떠나버린다면

그래서 동굴 안에서 혼자 새끼를 낳게 한다면

나는 낳자마자 우리의 새끼들을 모두 삼켜버릴 거다

하지만 너는 그렇지 않겠지

움직이지 못하게 된 내 곁을 지키면서

눈시울을 가느다랗게 하면서

내 뺨을 핥을 거다

후에 네가

수컷의 모험심을 만족시키려 떠난다면

나는 물끄러미 네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거다

그리고 다음 해 봄에는

다른 수컷의 뺨을 깨물 거다

평생을 같은 수컷의 씨를 품는 암늑대란

없는 거니까

가장 나이 들고 현명한 암컷이 되는 것

뜨거운 눈으로 무리를 지키면서

새끼들의 가냘픈 다리가 굵어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

그리하여 나는 거기까지 가는 거다

이 밤 이 산벚꽃나무 밑둥에서 출발하여

해 지는 언덕 밑에 자기 무리를 거느린

나이 든 암컷이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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