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일층으로 이사 와서
생애 처음으로 화단 하나 만들었는데
간밤에 봉숭아 이파리와 꽃을 죄다 훑어갔다
이건 벌레나 새가 뜯어먹은 게 아니다
인간이다 분명 꽃피고 물오르기 기다린 노처녀다
봉숭아 꼬투리처럼 눈꺼풀 치켜뜨고
지나는 여자들의 손끝을 훔쳐보는데
할머니 한 분 반갑게 인사한다
총각 덕분에 삼십 년 만에 꽃물 들였네
두 손을 활짝 흔들어 보인다
손끝마다 눈부신 고치들
나도 따라 환하게 웃으며 막 부화한
팔순의 나비에게 수컷으로 다가가는데
손가락 끝부터 수의를 짜기 시작한 백발이
봉숭아 꽃 으깨어 목 축이고 있다
아직은 풀어지지도 더 짜지도 마라
광목 실이 매듭으로 묶여 있다
- 이정록 시집 <의자> 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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