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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참 좋은-

자꾸만 장구가 되어가던 쌀통 / 상희구

 

 

 

 

대구 칠성동 단칸방 시절

큼지막한 손아귀 둘이 포개져서 악수하는

그림 위로 글귀도 선명한 UNKRA 유엔한국재건단의

커다란 원통형 분유통을 우리 집 쌀통으로 썼는데

쌀이나 보리가 그득할 때는 도무지 쌀통이란 것이

둔중하고 묵직해서 한 됫박을 퍼내도 그만

한 말을 퍼내도 그만이어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내용물이 점점 줄어들어 속이 비게 되면

이 쌀통은 큰 울림통의 장구처럼 되어 마침내 울기 시작한다.

어느 늦은 봄날 이었던가

신새벽, 몰래 일어나신 엄마가 바닥을

들어내기 시작한 쌀통을 긁자 쌀통이

버어억― 버어억 울었다.

 

“아이고 이 새끼들 우짜꼬”

“아이고 이 새끼들 우짜꼬”

 

엄마가 숨 끊어진 다음의 자투리같은

끓는 소리로 내 뱉었다.

 

나는 그때부터 새벽잠이 없어졌다.

 

장구든 북이든 쌀통이든

속을 비우면 다 우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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