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표를 뽑아 들고 세상의 호명을 기다려 본 자는 알리라
낯선 운명의 틈바구니에 끼여 울적스런 얼굴로 서면
문득 전신마취에서 깨어나는 얼얼함이 있어
창밖에는 봄바람 가을비 몰아치고, 거기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는 물컹한 비린내 번져난다는 것을
언제나 나만 비껴가는
단 한 번의 낮고 단호한 호명을 기다리는 동안
내 손에 잡힌 무엇보다 확실한 기다림을 잊기도 한다는 것을
세월은 망각의 텃밭을 일구며 아이의 엉덩이에 살을 올리고
물오른 젖가슴을 말린 건포도처럼 쪼그라들게 하지만
길은 부어오른 발등 격류에 던져 놓고
내가 도망쳐 나온 이탈의 길목이 어디쯤인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이
끝끝내 기다려야 할 그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으니
어쩌면 면박 당하듯 서있는 이 시간이
어떤 기억으로도 환생하지 못한 무수한 내 전생이거나
오지 않을 단 한 번의 호명을 기다릴 줄 아는
숨죽인 마음의 백만 년이거나
내 가슴에서 빈 기다림의 번호표를 뽑아갔던 단 한 사람의
기억되지 못할 일생一生은 아닐는지
이렇게 번호표를 뽑아들고 멍하니 서서 바라보는 것은
더는 세상에 구걸하지 않는 묵묵한 얼굴로
한 벌의 생을 완성하는 일
부드럽고 따스한 기다림의 안감을 덧대고는
붉고 뜨거운 혀끝에 그대의 이름을 새기는 일은 아닐는지
'좋은, 참 좋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자 사는 즐거움 / 사라 밴 브레스낙 (0) | 2022.11.13 |
---|---|
신현림의 서른, 나는 나에게로 돌아간다 中 (0) | 2022.11.13 |
상처 / 마종기 (0) | 2022.11.12 |
비오는 날의 커피 한잔 / 신현림 (0) | 2022.11.12 |
가을비와 커피 한 잔의 그리움 / 이채 (0) | 2022.1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