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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참 좋은-

썰렁한 농담 / 박형권

 

 

 

 

 

 

 

 

 

 

 

 

 

 

 

 

    가을볕이 노릇노릇하다

    밭에서 농부가 익어가듯 물에서

    어부가 익어간다

 

    일흔둘 아버지와 조개밭에 들어가

    허리까지만 바다에 넣으니

    바닷물에서 꾸꿉한 수건 냄새가 난다

 

    잘 삭은 조개젓 냄새로

    아버지는 눅진한 한 생을 쉬엄쉬엄 닦아 왔다

    아버지와 내가 두루미처럼 굽히고

    바다의 등 긁어 줄 때

    거제도로 가는 공기부양선은 허파에

    바람 잔뜩 불어넣고 건들건들 유람이다

 

    저 배에 올라 거제 장목으로

    문주리 낚시를 갈 때만 해도

    네 칸 반 민장대처럼 아버지는 빳빳했다

    바닷바람 먹은 호미처럼 아버지의 빳빳한 것들은

    어느덧 뭉툭해졌다

 

    파도를 밀어붙이는 힘과 슬쩍 놓아주는 꾀가

    어느새 그 뭉툭함 속에 배 묶는

    녹부줄처럼 사려져 있다

 

    아직도 아버지는 말술을 뱃속에 담고도

    한 말 더 짊어지고 오는 강골이지만

    가을 들어 몇 번 허리를 쉬고 몇 번 먼 섬을 보았다

    우리의 가을은 풍성하여 광주리마다

    굵은 조개가 넘쳐난다

    모두 아버지의 알통에서 살던 것

    파내면 등짝에서 피 흐르는 것들

 

    오늘 물옷을 갈아입는 아버지의 나체를 본다

    앙상한 가지에 나를 만든 도구만 덜렁거린다

 

    어쩌다 그리 마르셨습니까?

    아버지는 끈적한 묵음(黙音)으로 딸막딸막하다가

    내 죽으면 들고 가기 좋겠제?

    뜬금없는 농담 한마디에 어디서 칼칼한 바람 불어온다

 

    썰렁한 농담인데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추녀 끝에서

    담담하게 웃고 싶은 것이다,

    바다와 주민등록증을 까도 밀리지 않는 아버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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