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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참 좋은-

덕배는 파도 위에서 한다 / 박형권

 

 

 

 

 

 

 

 

 

 

 

 

 

 

 

 

 

 

나이 오십 바라보니 세상에 꽉 찬 것들도

다 헐렁해 보이기 시작하고

또 세상의 보드라운 것들이 나 잡수시오 하고 다가와도

가슴 벌렁거리지 않는데

쌍끌이기선망처럼 밀어주고 당긴 네 살 터울 마누라는

늦여름 모자반처럼 부쩍 감겨온다

덕배는 어제와 다름없이 일 톤짜리 조각배에

마누라를 태우고 달맞이꽃 살포시 오므린 밤에

기름 한 드럼을 채워 넣었다

덕배를 힘껏 짝사랑하던 머큐리 엔진도

우당탕탕 내질러야 할 터인데

이제는 삐걱삐걱 수조기 우는 소리를 낸다

이런 날에는 노래미 볼락들이 심해를 견디기 지루하여

물가로 밀려와 뻐끔뻐끔 담배 피듯 플랑크톤을 흡입하는데

별빛과 검은 밤에 취하여 해롱거리는데

뜰채로 걷어 올려도 사내 몸 끌어당기는 첫 밤처럼 다소곳하다

일하듯 놀듯 물칸* 가득 활어를 싣고 보니

큰놈 등록금 머잖아 맞추겠다 싶어 마음이 널찍해지고

고요하고 적적한 바다가 뽀얀 인광을 뿌리며

배의 겨드랑이를 핥는다

바다가 까닭 없이 반딧불이 꽁지처럼 환해지는 밤

마누라가 이 지점이다 싶은지

홍어냄새로 발효하여 덕배의 살점을 포옥 쓸어 쥔다

물그림자 황홀하고 별빛 초롱하다

아직 바다는 전복같이 납작하거나 개불같이 길쭉하다

바다의 凹凸이 새 바다를 낳나니 오목 하나 볼록하나

따로 남지 않는 그런 무탈한 세상 올 것만 같은 밤

덕배가 그거 한다

 

*물칸: 배의 갑판 아래 바닷물을 담아 두는 곳, 활어를 보관한다.

  ​-『현대시학』(201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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