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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참 좋은-

헐렁한 옷 / 이선영

 

 

 

 

 

 

 

 

 

 

 

 

 

 

 

 

 

 

 

 

 

 

 

 

   세상에 널린 여러 옷들 속에서

   나는 주로 헐렁한 옷을 골라 입는다

   그것은 내가 헐렁한 옷 속에

   나를 감춰두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나는, 맘껏 드러내놓고 싶은 만큼이나

   친친 감아놓고 싶은 어쭙잖음이다

   헐렁한 옷 속으로 내가 나를 슬쩍 집어넣으면

   나는 옷의 헐렁함 속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가고

   옷은 나를 끌어당긴 그 헐렁함의 미덕으로

   나의 윤곽이 옷 밖으로 도드라지지 않게 해주었다

   헐렁한 옷 속에서 그동안 나는 속이는 일의 간편함,

   세상에 나의 오목과 볼록을

   드러내지 않는 일, 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많이 입어 더욱 헐렁해진 옷 속에서 지금

   느껴지는 어떤 움직임, 질깃하게 짜여지지 못한

   내 삶의 올이 풀리고 있다!

   헐렁헐렁한 옷의 안감과 겉감이 있을 뿐이다

   처음부터 내가 헐렁한 옷의 안감이었던 것처럼

   속이고 속은 것이 다 나였다 안심하고

   나를 맡겨온 옷의 헐렁함이 비뚤거리긴 했지만

   수채화 붓자국이었던 나를 뭉개버렸다

   어디로 갔을까,

   내가 세상과 대적하여 어거지로 입었던

   그 헐렁한 옷 속에서

   독하게 꽃피워보지도 못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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