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비가 모자라서 돈 달라고 하니 남편은,
서재 방 어딘가에 백만 원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했다
만 권도 넘는 책들을 뒤져보라는 것인가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책 속 백만 원은 자신의 비상금이라고
찾을 수 있으면 내 비상금을 쓰라고 한다
밤새워서라도 찾아내고 싶어졌다
사면이 책으로 둘러싸여 있는 방
시계 돌아가는 방향에서부터 훑어 내려갔다
먼지투성이 속에 가지런한 책들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다가 누렇게 바랬다
입 벌어진 시집 속에서 발견한 건
이십 대 여자의 사진 한 장
아름다움은 젊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밀짚모자에 선글라스 기고 하얀 이를 드러낸 그녀
백만 원이 있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배경으로
멈추어 있는 시간을 보고 있다
그래, 나에게도 이런 날이 있었구나
돈만 있으면 주름도 없애고
눈, 코, 입. 턱까지 고쳐 미인이 되는 세상
남편의 비상금을 찾으려다가
우연히 찾게 된 나의 아름다운 비상금,
시집 속으로 다시 들어가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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