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세들어 살던 다세대주택 빈터
기둥에 매달린 샌드백 하나
아침저녁 젊은이들이 주먹을 단련했다
어떤 때는 오가던 사람들이
툭툭 스트레이트나 잽을 날리기도 했다
수없이 얻어맞은 샌드백, 나중엔
구멍이 나고 모래와 톱밥이 삐져나왔다
심하게 얻어맞거나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삐걱대는 걸고리 쇳소리가 마치 우는 것 같았다
어느 늦은 밤
울음소리에 밖으로 뛰쳐나왔다
생전에 울 일이 없을 것 같았던, 다 큰 누이를
별나라로 보내고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엄니가
컴컴한 뒤란에 쪼그려 앉아 울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됐다
점잖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시도 때도 없이
중량급 욕 펀치를 엄니한테 날렸고
그 펀치를 고스란히 다 맞은 당신이
샌드백처럼 너덜너덜 해졌던 걸
바람이 세게 불던 어느 날
심하게 덜렁대던 샌드백이 풀썩 땅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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