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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참 좋은-

존엄한 퇴거 / 나희덕

 

 

 

 

 

 

 

 

 

 

 

 

 


 

 

 

 

 

 

 

 

 

  2014년 10월 29일

  기초생활수급자였던 최씨는 서울 장안동

  다세대 주택에서 숨을 거둔 채 발견되었다

  10월 말까지 집을 비워달라는 주인의 요청에

  그는 퇴거신고를 하고 스스로 68년의 삶을 정리했다

  함께 살던 어머니는 석 달 전에 돌아가셨고

  그를 거둘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28일 이사, 29일 가스’라는 메모가 적힌 달력,

  마지막 전기요금 고지서 위에 놓인 오만 원짜리 지폐,

  봉투에는 백만 원 남짓한 장례비용이 들어 있었다

  만 원짜리 열 장이 들어 있는 다른 봉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고맙습니다.

  국밥이나 한 그릇 하시죠. 개의치 마시고.”

  자신의 주검을 거두는 이들을 위한 밥값이었다

  개의치 마시고, 라는 여섯 글자는

  주름진 손을 가만히 내저으며 말을 건넨다

  가난하지만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모르는 이에게도 예의를 갖추려는 표정으로

  " 개의치 마시고",

  그러나 사람들은 차마

  그의 유언대로 국밥을 먹지는 못했을 것이다

  주택공사에서 빌린 전세금을 제하고 나면

  더 이상의 재산도 빚도 남지 않았다

  완벽한 영점으로 돌아가는 것,

  존엄한 퇴거였다

  그의 집 앞에 매일 하나씩 놓여 있었다던 소주병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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