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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참 좋은-

과수원 / 고영민

 

 

 

 

 

 

 

 

 

 

 

 

 

 


 

 

 

 

 

 

 

 

 

 

  내가 하는 일은

  농약이 바닥에 가라앉지 않도록 하루 종일

  약통을 저어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중간에서 호스를 당겨주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1만평 과수원의 사과나무

  한 그루 한 그루 빠짐없이 농약을 쳤는데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햇빛에 앉아 막대기로

  커다란 농약 통을 젓는 것이 여간 지루하고

  심심한 일이 아니어서 나는 그 긴 막대기로

  약통 안에 영어 스펠링도 쓰고, 씨발이라고도 쓰고,

  보지라고도 쓰고, 막대기를 빠르게 휘저어

  회오리를 만들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양인순의 이름도 썼다가 지우기도 하고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한나절 사과나무에 약을 친 아버지가

  물큰 농약냄새를 풍기며 내게 걸어와

  마스크를 벗으며 하시는 말이,

  너 하루 종일 약통에다 뭐라 썼는지 내 다 안다!

  라며 내 머리통을 어루만지며 웃으시는데

 

  내가 저은 약통의 농약이

  어머니가 당기던 길고 긴 호스를 타고 흘러

  아버지가 들고 있는 분무기 노즐을 빠져나올 때

  ~발씨발씨발, ~지보지보지 이렇게 나왔던 걸까,

  아버지랑 어머니는 농약에 취해 회똘회똘 집으로 향하고

  나는 국광처럼, 홍옥처럼, 아오리, 부사처럼

  얼굴이 자꾸만 빨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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