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 참 좋은-

할머니의 절구통 / 김혜련

 

 

 

 

 

 

 

 

 

 

 

 

 

 

 

 

 

 

 

 

 

 

 

 

 

 

 

 

 

 

 

 

 

 

 

 

 

 

  살다보면 거두절미하고 죽고 싶을 때가 있다

  목젖까지 넘어오는 고통과 절망의 질감 속에서

  유일한 돌파구는

  자살이라는 결론에 목을 맨 적이 있다

  눈물샘이 불어나고 유서 한 장 써 낼 기운조차 없을 때

  할머니의 절구통은 내 죽음을 원천봉쇄한다

  할아버지는 육이오 때 수류탄 터져 죽었고

  외삼촌은 여순 사건 때 총 맞아 죽었고

  큰아버지는 월남전에서 죽어서 돌아왔다

  막내고모는 어릴 때 병원도 못 가보고 꼽추가 되었다

  할머니는 현미쌀눈보다 많은 세월 속에서

  못 생긴 바위하나 입양하여 날마다

  두드리고 갈고 찍고 때리고 달래며

  피맺힌 돌 절구 하나 낳았다

  새벽마다 꽁보리 찧어 지은 따순 밥 덕에

  시동생 자식새끼 손주손녀 다 제 밥벌이 하게 만든

  일등공신 할머니의 도구통

  담석 닮은 내 절망을 절구공이로 곱게 빻아

  가슴을 쓸어주신다

 

  "아가 -  저 도구통 이제 니 껏이다." 

 

 

 

'좋은, 참 좋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법문 / 복효근  (0) 2025.04.24
봄날에 / 이수익  (0) 2025.04.24
틈 / 백우선  (0) 2025.04.24
무늬 / 나호열  (0) 2025.04.23
바라밀다 波羅蜜多 / 안직수  (0) 2025.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