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만 취하면 그 얘기였다.
그날도 시장 근처 늘 가던 술집에서
거나하게 마시고 취한 김에 주모를 불러
영화배우 허장강이 하던 식으로,
마담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한번 할까, 하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을렀던 것인데
여자가 그날따라 선선하게 문단속하고 갈 테니
요 앞 여관에 먼저 가 기다리라고 하더란다.
그래 얼씨구나 싶어 그 여자와 잠자리에서
같이 먹을 요량으로 바나나 두 개 홍시 두 개
귤 몇 개인가를 사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콧노래 흥얼대며 들어가 잠자리 펴놓고 기다리는데,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금방 온다던 사람이 안 오는 거라.
그래 주섬주섬 바지를 꿰어입고 나가보니
술집은 벌써 불이 꺼져 썰렁하고 달만 휘영청 밝은데
전봇대 밑에다 오줌을 깔기며 닭 쫓던 뭐 모양으로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다 그길로 곧장
집에 들어갔던 것인데, 그때까지 잠도 안 자고
기다리던 자식놈이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받아 들고
아빠 이게 뭐야 하면서 애비 한입 먹어보라 소리도 안 하고
게눈 감추듯 하는 모양을 보고, 무어라 말은 못 하고
내 그놈의 집 두 번 다시 가나 봐라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는 것이다.
-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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