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으면
살구나무 아래 묻어달라던 계집아이는
이내 파리한 얼굴로 병마를 따라갔다
살구꽃 이파리들이 혈당처럼 지던
봄날이었다. 살구꽃이 필 때 낳았다 하여
행화, 그래서인지 유독 살구꽃을 좋아했던 아이
행화야 부르면 이름 대신 살구꽃 내밀며
환히 웃던 아이는 결국 다시
살구나무 아래로 돌아갔다
열다섯 외동딸을 잃은 홀아비는 마을 언덕
살구나무 밑에 뼛가루를 묻고 나무둥치에
묘비명을 새기며 섧게 울었다
그때부터 살구나무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듬해 봄이 되자 살구나무는 다시
수만 송이 꽃을 피우며 상큼한 향기를
마을까지 날려 보냈다
여름이면 노랗고 탐스런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해마다 어김없이 살구꽃이 필 때면
마을 사람들은 언덕을 바라보며 말했다
행화가 돌아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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