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이 허물을 벗는다
금속성 세탁기 안에서 뱀처럼 똬리를 튼 빨랫감
원심력에 휘둘려 중심에서 밀려난 저녁이면
파란 눈을 뜬 신음이 소용돌이친다
허물벗기에 방해가 되는 머리는
잠시 떼어두기로 한다
발 없는 하루가 배밀이로 기어가고
손 없는 하루가 물의 시간을 돌리고 있다
밤처럼 까만 구정물이 빠져나가는 동안
가족끼리 그러면 안 되는 옷가지들이
뒤엉키기도 한다
블라우스의 목을 조르는 청바지 얼룩
색이 다른 옷은 서로 다른 망에 담아야 했다
그것이 서로의 색을 존중하는 방식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방식
얼룩이 깊어진 후에야 얻은 깨달음은
얼룩진 한 생이 저만치 흘러간 뒤였다
몸에서 빠져나와 혓바닥을 늘어트리는 주머니
말에 찔린 말들을 되새기다 거품을 문다
거품이 거품을 키우다
거품이 거품처럼 사라지고
뒤엉킨 옷가지들을 발을 삐지 못한다
비비다 엉키다 물들다 짜내다 탈탈 털다
속을 빤하게 뒤집어 용서를 구하기도 한다
마지막 눈물 한 방울마저 짜내
습기를 거두는 시간
빨리 털어 말리지 않으면 주름이 깊어질 것이다
허물이 허물을 껴안는
한통속
- <상상인> 2022, 7월 -
'좋은, 참 좋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리봉동 61년 소띠 마귀순 씨 / 박제영 (0) | 2024.02.26 |
---|---|
어머니의 바다엔 병어만 산다 / 노향림 (0) | 2024.02.26 |
사랑이라는 것 / 이강산 (0) | 2024.02.25 |
포천 / 마윤지 (0) | 2024.02.25 |
절 / 이홍섭 (0) | 2024.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