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는 남포동에서 광복동으로 이어지는 사잇길
할매국수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왼쪽 갈비뼈 사이로 들어오는 허전한 바람을
애써 지우고 또 지우다가 끝내 보이지 않는
그녀의 하얀 목덜미가 아프게 각인되는 순간
누군가가 날 밀치고 국숫집으로 들어갔다.
창 안을 더듬는 내 눈엔 자꾸 물안개가 번졌다.
그때 나는 비틀비틀 골목길을 빠져나와
남포동 거리에서 시청 쪽으로 향하다가
자갈치 방향으로 등을 돌렸는데
젊은이들의 함성이 갑자기 길을 메웠다.
어수선한 발걸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기 시작하고
물러가라 외치는 고함이 고막을 찢었다.
데모대의 맨 앞에서 구호를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가
내 귀에까지 와 닿지는 않았다.
그때 그녀는 나를 보지 않았다.
그때 나는 시대가 나를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남포동의 네온사인들이 휘황한 내일을 말했지만
점점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뒤꼭지에서
내 시야는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했다
그때 나는
남포동이 내 젊음의 무덤이란 걸 알지 못했다.
'좋은, 참 좋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움은 그리움끼리 / 양현근 (0) | 2024.09.21 |
---|---|
가을이 오면 / 김경호 (0) | 2024.09.20 |
마중 / 허림 (0) | 2024.09.20 |
비 / 최덕순 (0) | 2024.09.20 |
감꽃 / 김현 (0) | 2024.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