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자, 이브의 보리밭 90-6, 162.2x130.3cm, 1990
도루코 면도날이 지나간 자리처럼
잘 다듬어진 잔디밭은
내 발길을 머뭇거리게 하거나 돌려세우고 만다
거울 속 면도하는 남자처럼
그 만의 얼굴에 빠져 있는 듯한 잔디밭은
어쩐지 다가서기도 건드리기도 불안하다
그러나 몇날며칠 깎지 않은 수염처럼
거칠고 꺼끌꺼끌한 보리밭을 지날 때면
옛 남자를 본 듯 반갑고 가슴 뛴다
쓰다듬을 때마다 손바닥 따끔따끔 찌르는 수염은
그가 키운 억센 야성의 그리움 같아
와이셔츠 단추를 풀듯 개망초꽃 하나 둘 풀어헤치고
등에 풀물 베이도록 와락, 그를 안고 싶어진다
그럴 때 바람은 거품 같은 구름을 풀어
비탈 전체를 밀어 버릴 듯 지나가겠지만
그럴수록 보리는 거웃처럼 무성하게 다시 일어설 테지
고랑마다 더 비리고 축축한 청보리 냄새 풍길 테지
예나 지금이나 짐승의 피를 나눈 것들은
이토록 후안무치해서
멀리 둥근 눈을 가진 새들마저 몰카처럼 찰칵찰칵 날아간다
무인모텔,
그 청보리밭 비탈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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